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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곰탱이
  • 14-02-18 17:42
  • 5,031

[역사쏙쏙 Part 4] 추사 김정희 2(과천 추사박물관)

 
 
 
추사의 작품들은 추사가 유배되었을 때 나온 작품들이 많답니다.
 
 
 
 
특히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세한도”역시 그러하지요.
 
 
 
 
 
추사는 24세(1809)에 생원과에 합격하였고, 34세(1819)에는 문과의 병과에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게 됩니다. 그의 나이 41(1826)에는 암행어사가 되어 충청우도에 파견되지요.
 
서산에는 공적을 기린 “어사김정희 영세불망비가”전해진답니다.
 
1840년 55세의 나이로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받고 제주의 대정현에 유배
 
되었습니다.
 
 
 
 
 

 
 
 
윤상도의 옥사란 윤상도란 사람이 호조판서 박종훈과 유수 신위 기르고 어영대장 유상량 등
 
탐관오리로 탄핵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군신간에 이간을 시킨다는 이유로 추자도에 유배되고
 
 
추사의 아버지인 김노경은 배후조종혐의로 고금도에 유배됩니다. 당시 사건은 1830년의 일이
 
습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후에 추사가 윤상도 부자가 올렸던 상소문의 초안을 만들었다
 
이유로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된 것이지요. 
 
 
 
 
1840년 9월 4일부터 1848년 12월 6일까지 9년 3개월간의 기나긴 유배기간이었습니다.
 
 
 
 
유배는 죄인을 먼 곳으로 수용하는 형벌이랍니다. 죄의 경중에 따라서 6개의 유배방식이
 
있습니다.
 
 
 
 
◎ 본향안치 : 고향에 머무르게 하는 가벼운 유배
 
◎ 사장안치 : 개인 별장에 머무르게 하는 가벼운 유배
 
◎ 자원처안치 : 스스로 유배지를 선택하는 가벼운 격리 유배
 
◎ 주군언차 : 일정한 지방을 정하여 그 안에 머무르게 하는 유배
 
◎ 절도안치 :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검에 안치시키는 유배
 
◎ 위리안치 : 유배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울타리를 두르고 그 안에 가두는 유배, 안치
 
유배 가운데 가장 중형
 
 
 
 
제주도로 간 추사의 유배는 가장 최고의 유배인 위리안치였습니다. 울타리 안에서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는 유배이지요.
 
 
 
가족과도 벗과도 멀리 떨어져 외로운 유배생활이었지만 이 기간 동안 추사는 백파율사와
 
선(禪)의 논쟁을 벌였고 독특한 서풍을 만들어내는 등 학문과 예술에 열정을 불살랐답니다.
 
 
 
 
특히 역관 제자 이상적은 추사에게 청나라에서 구해온 귀한 책들을 보내주며 스승에게 성심
 
을 다했습니다. 이에 송나라의 소동파가 혜주로 유배되었을때 소동파의 어린 아들이 소동파를
 
위해 먼 곳까지 찾아온 것에 고마워 “언송도”라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던 것처럼 추사 역시
 
자신의 언송도를 만들어 이상적에게 준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세한도입니다. 
 
 
 
 
 
 
 

 
 
세한도를 받은 이상적은 너무 기뻐하였고 그림을 청나라로 가져가서 청나라 학자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이 세한도를 보고 청나라학자 16명이 찬사의 글을 그림에 덧붙였지요. 여기에 근대 인물인 오
 
세창, 정인보 등이 글을 더 붙여서 그림의 길이는 70cm정도이지만 발문의 길이는 무려 13m 나
 
된답니다. 발문을 더 쓸 수 있는 빈 공간도 남아있지요.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는 서울 용산에서 머물렀지만 1851년 다시 모함을 받아 함경도
 
북청으로 1년간 유배되었습니다.  북청 유배는 주군안치라는 유배였기 때문에 고을을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었답니다.
 
 
 
 
여기에 친한 후배인 윤정현이 함경감사로 오게되면서 윤정현과 함께 황초령에서 발견된 진흥
 
왕 순수비를 진흥리로 옮기고 비각을 세웠답니다. 이 비각의 현판을 추사가 썼지요.
 
 
 
 
 

 
 
 
 
 
짧은 북청유배가 끝나고 추사는 아버지인 김노경이 지은 과지초당이 있는 과천으로 돌아와 여
 
생을 마무리한답니다. 추사가 돌아가시기 3일 전에 쓴 글씨가 남아있는데요. 강남 봉은사의 불
 
경을 보관하는 곳인 대장각의 현판인 “판전”이라는 글씨가 추사의 마지막 흔적이지요.
 
 
 
 
 
 
 
 
 

추사는 그의 글씨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영향을 끼치지요. 조선 뿐 아니라 중국에 이르
 
기 까지 말이에요. 그렇다면 추사는 어떻게 이렇게 글씨를 잘 썼을까요?
 
 
 
 
추사가 친구인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답니다.
 
추사는 “... 제 글씨는 비록 말할 것도 못 되지만 70년동안 벼루 열 개를 갈아 구멍을 뚫고
 
천 자루의 붓을 닳게 했습니다. ... ” 란 구절에서 연습으로 인해 자신만의 서풍을 완성하였
 
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856년 71세의 나이로 추사 김정희선생은 과지초당에서 긴 삶을 마무리했습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얼마나 대단한 학자이며 문장가이며 서예가일까요?
 
바로 아래 그림에서 알 수 있습니다.
 
 
 
 
 

 
 
 
완당선생(추사)은 제가 아직까지 그 모습을 뵙지 않았지만 그 문장과 학문을 오래 우러러
 
사모했습니다. 그래서 이 그림을 그려 보내드리오니 살펴보십시오. 혹시 모습이 비슷하다
 
고 여기시면 수염 쓰다듬으며 한번 웃으십시오.”       - 1853년 7월 강남에서 정조경
 
 
 
 
1856년 청나라의 학자 정조경은 추사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문복도를 그려 추사에게 보냅니다.
 
정조경은 추사를 한번도 만난적이 없지요. 하지만 추사의 그림과 문장, 학문에 감동을 받고 존
 
경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이랍니다.
 
 
 
 
추사 및 그의 작품들의 힘을 알 수 있지요.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작품은 영원
 
할 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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